갈현동 동명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두 가지 설은 모두 그 어원인 '가루개'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현재 갈현1동 주민센터 뒤편에 있던 가루개 고개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대에는 예전부터 칡뿌리가 많아서 가루개, 갈고개, 칡고개, 칡넝쿨 고개, 갈고리라고 불리다가, 갈현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칡뿌리를 캐 약제로 팔거나 줄기를 벗겨 갓을 만드는 재료로 썼고, 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할 때는 식용으로 대용하였다고 한다. 다른 설은 가루개가 '가른다'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못골과 효경골 그리고 가루개 등 세 마을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는 견해이다. 효경골은 현 대성고등학교 일대이다. 이곳에 거주하던 밀양 박씨 문중에서 대대로 효자가 많이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에는 옛날에 유명한 서당이 하나 있었는데 효경골 서당이라 불렀다. 일명 세경골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마을 이름 중 현재는 갈현만이 동 이름으로 남아 있고, 궁말, 길마, 갈곡리, 좌월 등은 공원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 이외의 이름들은 도시개발로 잊혀 가고 있다. 현 갈현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 갈현계 때부터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갈현 이외에도 궁동, 좌월동, 효경동, 반석동 등이 함께 속해 있었다. 각각의 마을 이름 및 지역은 자연환경, 역사적 사건, 마을의 생활 및 사건과 관련하여 붙여졌다. 먼저 자연환경과 관련된 명칭은 온수골, 못골, 길마둑 등이다. 온수골은 박석고개 부근 갈현로 45길 10부근의 옛 지명으로, 겨울에도 이곳에는 더운물이 나는 샘물이 있어 온수골이라 불렀다. 온수골에 얽힌 '온수골 채동지' 설화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벌이고개는 서오릉로 22길 17 일대의 고개였다. 갈현 2동의 옛 자연부락인 궁말에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버리고개, 벌고개로도 불리며, 한자로 봉현 또는 벌현이라 하였다. 봉현의 유래를 보면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별세하자 능이 명릉으로 정하고 지관이 하관에게 이 고개를 넘어 하관 하자 하늘이 노하여 천둥번개를 치고 무수한 벌떼가 나타나 하관을 쏘아 죽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벌현의 유래는 경릉 주변에 해당하는 이곳의 지반이 낮고 약하여 사람이 지나다니면 더욱 낮아질까 열려되어 일반 백성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면 큰 벌을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못골은 갈현1동 주민센터 뒤편 갈현로 41길 13 일대이다. 60년 전만 해도 산울타리 안에 싸여 있는 연못이 있던 자연촌락의 이름이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광주 이 씨의 집성촌으로, 인조반정 당시 이경이 관직을 버리고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이경의 훈계에 따라 과거시험을 멀리하고 농사에만 전념하여 살았으며, 지금의 은평구 지역에서 널리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마을의 생활이나 사건과 관련하여 붙여진 명칭으로는 좌월, 효경골 등이 있다. 좌월은 연서로 21길 36 일대 지역으로 조선시대 어느 충신이 퇴직한 후 이곳에 기거하면서 삼각산 위에 떠오른 달을 매일 바라보면서 임금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빌었던 것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궁말은 궁궐에서 일하던 궁녀들이 나이가 들어 일할 수 없게 되면 궁궐에서 10리 내에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서오릉과 가까운 이곳에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상궁의 묘들과 석물들이 많았는데 개발사업으로 이장되었다. 길마 둑은 연신내 사거리에서 예일여고 사거리 부근에 개천 둑이 자연적으로 우뚝 솟아 넓은 마루터가 생겼는데, 이곳의 생긴 모양이 마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올려놓은 일종의 안장인 길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생긴 명칭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였다. 이어 1396년 백악산,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연결하는 약 18km의 도성을 쌓았으며, 한성부의 공간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5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부를 방으로 구획하여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였다. 한성부의 공간을 도성을 기준으로 성내 지역과 성외 지역으로 구분하였는데, 도성으로부터 10리 이내의 성외 지역을 성저십리로 불렀다. 갈현동 동명의 유래가 되는 칡 고개가 있는 지역은 한성부 행정구역의 성저십리에 포함된 지역으로 한성부와 경기의 경계 지점이었다. 1867년 반포된 육전조례 기준으로 한성부는 5부 37방 340계로 조직되어 있었다. 현 갈현동은 한성부 북부 연은방 갈고개계로 기록되어 있어, 정조대에 재편된 행정조직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비고나 육전조례에는 갈현계를 갈고개계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5부를 5 서로 명칭을 고쳤다. 그리하여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북서 연은방 갈현계가 되었고, 갈현계 내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궁동, 좌월동, 효경동 등의 마을이 포함되었다. 현재의 은평구 지역은 조선 초기 한성부의 서대분 밖에 위치하였고, 개성, 평양과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또한 보부상과 파발 및 중국으로 내왕하기 위한 사신들이 다니는 주요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른 성저십리 지역과 달리 인가가 조밀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였다. 특히 갈현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된 칡고개는 서울과 의주 방면을 잇는 길 가운데 있는 고갯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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