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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역사

서울시 구로구에 관련하여

by 21세기 여행자 2022. 11. 9.

구로구는 서울시 남서쪽 끝에 있는 도시다. 서쪽으로는 부천과 금천이 있고 동쪽에는 영등포구와 관악구가 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구로구에서 나눠지고 서쪽으로는 인천 방면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구로구가 도시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된 계기는 1960년대 후반 구로공단이 조성되고 1971년 구로동에 1000여 채의 공영주택 등이 건설되면서부터다. 주변에 산이 많은데 굴봉산, 개웅산, 매봉산, 건지산, 염주봉, 이름이 재밌는 두루미산, 몰리산, 뒷매봉, 지양산, 보름뫼, 두리봉 등이 있다. 주변에 하천도 많다. 유명한 안양천, 관악구에서 발원하는 도림천, 목감천, 오류천, 역곡천이 그것이다. 구로구 일대를 포함한 한강 유역에서는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삼한 시기부터 독자적 정치체제를 가진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말기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중앙 정계가 혼란을 거듭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졌다. 이에 지방 유력자가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호족이 출현했다. 지방 호족 세력은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하고 민인을 지배했다. 한주 관내에서는 구로구 일구가 포함되어 장제군에서 이희목이 유력한 호족으로 등장했다. 그는 고려 건국 후 개국공신에 임명되었으며, 부평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 마한의 50여 개 소국 중 구로구 지역에 있었던 소국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휴모탁국을 부평 일대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어 구로구 지역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구로구 지역은 경기의 일부로서 화려한 개경 문화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고려 후기 이규보의 시에 보면 구로구 일대가 속한 부평부의 풍속에 대해 사람이 순박하고 일이 간단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개국 초기부터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고려 초기 구로구 지역은 고구려의 주부토군, 신라의 장제군 지역이었던 수주의 관할에 속했다. 후삼국 시기에는 궁예 세력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995년에 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에 이를 폐지했으며, 다시 1018년에 지주사로 바꿨다. 고려시대 수주에는 수주 역이 있었다. 수주 역은 청교도에 속한 15개 역 중 하나였다. 청교도는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역로로서 개경과 경기 지역을 아우르는 교통망이었다. 수주의 방어시설로는 계양산선이 있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 동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 구로구 지역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수주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서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다. 부평은 도호부를 설치한 후 1438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에 복구되었다. 1505년에는 살인사건의 범인이 이 고을 출신이라는 이유로 1년간 부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했다. 1698년에는 후일 인조의 아버지로 추증되는 원종의 능인 장릉에 불을 지른 방화범 최필성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10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체계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했다. 구로구 일대가 속한 행정구역은 부평도호부였다. 도호부는 전국적으로 44개가 설치되었으며, 종 3품관 도호부사가 부임했다. 이듬해 1414년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여 금과 현으로 했다가 2개월 뒤 혁파했다. 다시 양천현과 병합하여 금양현으로 했다가 1년 후 금천현으로 복구하기도 했다. 1456년에도 금천현을 과천현에 병합했다가 곧 복구한 바 있다. 1795년에 이르러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했다. 시흥이란 고려시대 금주의 별칭이었는데 수백년이 지나 공식 행정구역명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구로 지역은 과거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과 동면, 부평군 수탄면, 영등포구 일부가 편입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시흥군 일대는 금주, 금천 혹은 시흥이라고 불렸다. 현재 경기도 광명시도 오래전부터 금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구로구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금주와 부평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구로구 지역은 시흥군 북면과 동면 그리고 부천군 계남면 일대에 많이 걸쳐있었다. 먼저 시흥군은 1895년 전국 23부를 시행하면서 시흥현이 인천부 시흥군으로 되었다. 이듬해 13 도제를 시행하면서 경기도 시흥군으로 바뀌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1914년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 일원을 통합하여 시흥군이 되었다. 한편 부천군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만들어진 군이다. 철도 부설 공사를 담당한 일본 토건회사는 숙련된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공사에 필요한 인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 사이에 임금 격차가 3배에 달했으며, 그나마 중간 관리자의 착취가 있어 한국인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27년 구로구 지역에서는 소작료 인상에 대항하여 부평 농민조합이 조직되었다. 1920년대 제1기 산미 증식 계획에 의거하여 1923년 부평 수리조합이 인가되었다. 부평 수리조합은 부평 평야 3,872 정보 중 3,601 정보를 몽리구역으로 하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 규모의 수리조합이었다. 1927년에는 수리조합 구역 내 지주 300여 명이 지주회를 조직하여 소작료 인상을 주장했다. 이에 4,000여 호의 소작민은 부평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1904년 9월 구로의 동민은 군수의 비행을 성토하는 사발통문을 돌려 한천교에 집결할 것을 결의했다. 한천교 집회에 모인 동민은 관아로 가서 군수 입회하에 인부 차출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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